“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제가 제문재라니까요. 제가 제문재인데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대전시민뉴스 김왕규 기자] 어제까지 아무 문제 없이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은행에 갔는데 자신의 계좌를 사용할 수 없다. 휴대전화도, 신분을 확인할 방법도 하나씩 막힌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내가 나라고 말하는데 세상은 오히려 나를 가짜라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지난 8월 28일 공개된 넷플릭스 리미티드 시리즈 <들쥐>는 바로 이 불쾌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세상을 피해 스스로 은둔해 살아가던 소설가 제문재. 어느 날 자신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둘 작동하지 않기 시작한다. 더구나 자신이 사칭범으로 몰리고, 급기야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다. 드라마 <들쥐>에서 주인공 제문재(류준열 배우)는 사채업자 노자(설경구 배우)와 손을 잡고 삶을 되찾는 이야기로 펼쳐지는데 제목이 주는 무게감처럼 들쥐의 공포는 단순히 신분 세탁한 제문재와 똑같은 얼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이건 진짜 너를 찾는 지독한 게임 같은 거야.”
이름도 같다. 얼굴도 같다. 누군가는 나를 봤다고 말한다. 기록도 남아 있고 지문도 있는데 모두 틀렸다고 한다. 다르다가 아닌 틀리다는 것으로 사채업자 노자(설경구 배우)는 한숨을 쉬면서도 본인을 끝까지 찾도록 제문재(류준열 배우)를 돕는다. 완벽한 가짜가 3년 동안 악착같이 준비한 신분 세탁 앞에서는 무죄추정원칙도 무너질 수 있으며 제문재(류준열 배우)가 열심히 증명하고자 내놓는 졸업증명서, 신분증, 출판계약서, 등기부등본, 그리고 본인의 지문까지 모두 위조될 수 있는 산물이라는 것을 시청자들도 함께 한탄하게 된다. 주변의 상황도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사람을 증명하는가? 원작자인 루드비코 작가가 최근 인터뷰에서 작품의 근원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를 “무엇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하는가?”라고 설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작품 속 인물들을 정의로운 영웅이라기보다는 도덕적으로 모호하고 결핍을 가진 보통 사람들로 바라봤다. 이번 법률 칼럼에서는 임지혜 변호사(법무법인 대련)와 함께 드라마 <들쥐>에서 던지는 여러 질문을 법정으로 옮겨놓으려고 한다.

▲사진설명=법무법인 대련 김범식 대표 변호사 업무모습. /사진=법무법인 대련 제공.
형사소송법 제275조의2는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다. 범죄사실을 인정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고 형사소송법 제307조는 그 범죄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로 증명돼야 한다고 정한다. 여기까지 보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 수도 있다.
“나는 안 했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경찰이 증거 없이 괴롭혀요.”
법무법인 대련 임 변호사는 “수사는 범죄혐의의 존재와 실체를 확인하는 절차이고 수사기관 역시 적법절차와 객관 의무를 따르기에 무죄추정은 국가가 지켜야 할 원칙이지, 피의자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행동지침은 아닙니다.”라고 하며 법률상 원칙과 당사자가 체감하는 현실 사이의 긴장감을 설파하였다. 만약 피의자로 특정돼 출석요구를 받았다면 적어도 수사기관이 특정 범죄혐의와 관련해 그 사람에게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내가 제문재라니까요, 도대체 몇 번을 말해요?”
제문재(류준열 배우)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본인에게 이보다 명백한 사실은 없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기록과 사람들의 기억, 거래와 행동의 흔적이 다른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하면 그 한마디만으로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 현실의 형사사건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본인이 피해자이거나 정말 몰랐거나 가담한 적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수사기관의 기록에는 고소인의 진술이 있고, 계좌이체 내역이 있고, 통화기록이 있고, CCTV가 있고, 메시지가 있다면 그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무죄를 입증해야 해서가 아니다. 이미 만들어진 의심이 어디에서 시작됐고 그 의심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중요하다.
형사소송법 제308조는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고 규정한다. 이 문장만 떼어 읽으면 판사가 마음 가는 대로 판단해도 된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임 변호사는 “법관은 공판에 제출된 적법한 증거와 논리, 경험칙을 토대로 증명력을 판단합니다.”라고 하며 “더구나 바로 앞선 형사소송법 제307조는 범죄사실의 인정에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을 요구하기에 재판은 결국 어떤 이야기가 더 그럴듯한가의 경쟁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증거와 모순 없이 연결되는가를 검증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라고 하며 드라마 <들쥐>의 제문재(류준열 배우)가 마주하는 잔혹한 질문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매우 가까운 일상이라는 것을 전하였다.

▲사진설명=넷플릭스 드라마 ‘들쥐’의 정체성 혼란을 표현한 AI 생성 이미지. /사진출처=ChatGPT 생성 이미지.
얼굴이 같다고 해서 내가 되는가. 신분증을 가졌다고 해서 내가 되는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나라고 믿으면 그 사람이 내가 되는가? 반대로 생각하면 질문은 현실적인 법률문제로 바뀐다. 누군가 내 명의를 사용했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밝힐 것인가. 내가 하지 않은 거래가 있다면 당시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계좌가 범죄에 사용됐다면 실제 사용자는 누구인가. 휴대전화에서 메시지가 발견됐다면 누가 작성했는가. 피해자가 나를 지목했다면 그 기억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는가. 결국 법률분쟁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확신과 그 진실을 타인이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일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왜 하필 나야?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이 이야기가 드라마에만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단하게 살아가는 일상 속 균열은 짓궂게도 예고 없이 찾아올 때가 많다. 손톱을 깎다가 조금 부서진 정도, 대출 이자 때문에 걱정한 가운데 조금 더 낮은 이자에 전화를 받은 정도, 동창회에서 소개한 친구의 보험에 가입한 정도, 친한 친구의 업무를 위해 휴대폰을 건넨 정도, 어떠한 마음과 의지든, 인지를 했든 실수를 했든 살면서 우리는 피의자로 조사받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고 참고인으로 확인할 것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피해자가 되어 경찰서를 찾아가야 할 수도 있다. 그 순간 사람은 본능적으로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분노와 원망과 질책을 물으며 타인에게 전가하고 다시 자신을 원망한다. 억울함을 설명하느라 정작 혐의가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거짓말한다고 분노하면서 어떤 자료를 확보해야 하는지는 놓친다.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처벌해 달라는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을 당했는지, 언제부터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뒷받침할 자료가 무엇인지 구조화해야 한다.

▲사진설명=넷플릭스 드라마 ‘들쥐’를 표현한 AI 생성 이미지. /사진=ChatGPT 생성 이미지.
대련 임 변호사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형사사법의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다만 그것이 피의자에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실제 사건에서는 ‘나는 하지 않았다’는 결론보다 왜 나를 의심하게 됐는지, 수사기관이 어떤 사실과 자료를 보고 있는지, 그 가운데 사실과 다른 부분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피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함이나 분노를 넘어 자신이 겪은 일을 증거와 사실관계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전하였다. 몸에 열이 조금 난다고 반드시 병원에 가는 것은 아니다. 약국에서 해열제를 사 먹고 쉬면 나을 때도 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통증이 지속되거나 증상이 심해진다면 우리는 시간을 내고 비용을 들여 병원을 찾는다. 의사가 대신 아파줄 수 있어서가 아니다.
지금 나타난 증상이 무엇인지 진단하고 더 큰 문제가 되기 전에 치료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다. 무죄추정의 원칙도, 증거재판주의도, 자유심증주의도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막연한 의심이나 확신만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형사사법의 약속이다. 동시에 그 약속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구성하는 사실과 증거가 법정까지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래서 법률전문가의 조력이란 거창한 승소의 약속보다 먼저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를 함께 진단하는 일이어야 한다. 드라마 <들쥐>는 이름과 얼굴을 빼앗긴 한 남자의 이야기처럼 시작하지만 끝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조금 다르다. 당신의 일상을 갉아먹는 들쥐가 나타났을 때,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 자신을 증명할 것인가? 그리고 어쩌면 법은 그 질문에 대신 답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동안 길을 잃지 않도록 옆에서 밝혀주는 하나의 등불인지도 모른다.
※ 본 칼럼은 넷플릭스 드라마 '들쥐'의 설정을 바탕으로 무죄추정의 원칙과 자유심증주의, 형사절차에서의 증거 판단 등 법률적 쟁점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됐습니다. 법무법인 대련은 사건 관계자의 권리 보호와 절차적 공정성을 바탕으로 법적 쟁점과 사회적 책임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법적 판단은 개별 사건의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작품 정보: 넷플릭스 드라마 '들쥐'
※ 칼럼 법률 자문: 임지혜 변호사(법무법인 대련)
매주 금,토 18시~22시 중앙시장 화월동(제3주차장 앞)